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 벌어진 지 5개월이 흘렀다.
많은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보다는 오히려 피해자가 매장되거나 공동체에서 사라지는 일로 끝나곤 했지만, 이번에는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고려대 안팎에서 벌어져 다행히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출교 요구 서명에 동참하고, 시민사회단체들도 고려대 당국에 가해자 봐주기 시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런 항의 행동 덕분에 가해자 3인이 출교되고 1심 판결에서 실형을 선고 받는 등 가해자들을 비호하려는 움직임에 맞선 항의는 분명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학생행진(이하 행진)은 이런 출교 요구 운동의 의의와 성과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운동의 문제점을 주로 지적하는 평가를 하고 있다.
고려대학생행진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 고려대 반성폭력연대회의는 출교 요구 운동이 벌어지는 중에 여러 차례 대자보를 통해 출교 요구를 비판적으로 다뤘다. (이 대자보들이 모두 행진 명의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이 세 단체 모두 행진이나 그 활동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곳이고 행진이 이 대자보들을 모두 비판 없이 자료로 첨부하고 있으므로 대자보 내용을 행진의 주장으로 간주하고 다룰 것이다.) 가해자들이 출교된 뒤에도 행진은 뉴스레터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22호를 통해 출교 요구 운동을 비판했다(‘고려대 성폭력 사건에 부쳐: 또 다시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페미니즘 운동 그 자체가 필요하다!’). 이 글은 최근 발행된 ≪전국학생행진 팜플렛 7호≫에도 실렸다.
행진은 성폭력이“일상적으로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번 사건만 특수하게 봐선 안 되고, “우리가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행진은 이번 출교 요구 운동이 “[성폭력을] 소수 파렴치한들의 문제”로만 여겨 “공동체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우리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성폭력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므로 “퇴학, 출교 등 처벌문제는 우리의 반성을 대신할 수 없 “고, “가해자들의 기록을 공동체에서 삭제하는 것으로 편하게 해결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무서운 일”이라고도 한다.
행진은 출교 요구가 “처벌주의”로 경도된 것이고, “명문 사학 고려대의 명예를 더럽히는 범죄자들을 퇴출”시키려는 “정화주의”일 뿐인 양 취급한다. 또, 출교 요구가 학교의 징계권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의 문제?
행진은 출교 요구가 ‘우리 모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이런 태도는 행진의 의도와는 달리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작용할 수 있다.
행진이 '우리 모두의 문제' 운운하며 고려대 성추행 가해자 출교의 필요성을 흐리는 것은 남성들이 일상적으로 보이는 여성차별적 태도들이 모두 성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분석과 관련 있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성폭력의 범위는 무한정 확대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행진이 “성폭력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사례로 든 것들은 다음과 같다. “여성의 외모, 육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평가”하는 것, “여성이 원하지 않는 성별 역할을 강요하는 것”,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서 일어나는 일들” 등 …
위의 사례들은 분명 여성차별적인 언행의 사례다. 그리고 좌파 활동가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여성차별적 언행이 스스럼없이 용인되는 분위기에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여성차별적 관념에서 비롯한 모든 언행들이 전부 성폭력은 아니다. 성폭력은 여러 여성차별적 행동 중에서도 특히 상대방의 의사를 거슬러 강압적으로 하는 성적 행위를 뜻한다.
여성차별이 체계적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차별적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고 여성차별적 언행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단지 남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여성차별적 관습을 딸에게 강요하는 여성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이 여성의 의사를 거슬러 성적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은 전체 남성 중 소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폭력이 남성의 폭력적 본성이나 제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보수적인 편견에 도전할 수 있다.
성폭력의 개념을 무한정 확장하는 태도는 성폭력과 그렇지 않은 행위들 사이의 차이를 흐려 진정한 성폭력의 심각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 또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 취급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성폭력을 비롯한 여성차별 문제에 대해 평범한 남성들과 토론하고 그들을 여성해방 운동에 동참시키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번 고려대 성추행 사건에서도 행진은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해 놓고는 ‘우리 모두가 성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성추행 가해자와 가해자 처벌을 요구한 사람들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전혀 구별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결국 행진은 여성의 의사를 거슬러 옷을 벗기고 함부로 추행ㆍ촬영하고 2차 가해까지 저지른 고려대 성추행 가해자들의 행동과, 그것에 반대해 출교를 요구한 사람들의 행동을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출교 요구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 평소에 여성차별적 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유로 그들이 반성폭력 운동에 참가한 사실마저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현재는 모순적이고 불충분할지라도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성차별적 편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렛대로 여성해방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조직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 처벌 문제
위와 같은 행진의 분석은 성폭력 가해자 처벌 문제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낳았다.
물론, 행진의 주장처럼 성폭력이 단지 정신나간 개인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에 대한 왜곡과 소외, 그리고 여성차별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동등한 주체로 여겨지지 않고 성적 대상화되고, 여성의 성은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대중매체는 여성을 눈요깃거리로 만들고, 성적 이미지를 이용해 상품을 판매한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이유는 사회 전체가 여성차별적 기반 위에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어머니, 아내로서 가족에 헌신할 것을 요구받고, 양육의 주된 책임자라는 굴레에 묶여 있다. 여성이 가족 내에서 하는 구실 때문에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온갖 여성차별이 합리화된다. 성폭력과 성희롱이 벌어지는 것은 이처럼 사회 전체에서 여성이 열등한 취급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다함께는 여성차별의 뿌리인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성폭력이 구조의 문제라고 해서 성폭력을 저지른 개인들을 징계ㆍ처벌하는 것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성폭력의 근원인 여성차별을 낳는 체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 노동자가 단결해 체제 자체의 변혁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라도 성폭력을 저지른 개인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폭력에 대한 여성차별적 편견 때문에 여러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의 행위는 쉽게 합리화되고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피해자가 손가락질받고 공동체에서 배제되곤 한다. 이런 일을 막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여성차별적 편견에 도전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는 구체적 사건에서 가해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가령,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에서 여성운동은 이것이 단지 ‘여성의 예민한 반응’이 아니라 명백한 직장 내 성희롱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은 당연히 법원이 가해자의 유죄를 인정하고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과 직결됐다.
또한, 여성운동은 성폭력 재판에서 판사가 피해자 여성이 술을 먹었거나 밤늦게 돌아다녔거나 ‘야한’ 옷차림을 했다는 등의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하거나 감형을 하려는 시도에 반대해 왔다.
물론 성폭력을 낳는 구조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자 한두 명을 처벌한다고 성폭력이 근절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운동을 통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고,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여성차별적 편견에 도전할 수 있다. 이번 출교 요구 운동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필요했다.
사실 가해자 처벌에 대한 행진의 입장은 일관되지도 않다. 현재 활동 중인 ‘현대차 하청공장 성희롱 피해 여성노동자 지원대책위’ 역시 현재 피해자 원직복직과 더불어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행진도 이 지원대책위에 가입해 적극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운동에서 행진은 ‘우리 모두가 문제’라며 ‘가해자 찍어내기’를 해선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출교
물론 이번 고려대 성추행 사건에서 징계 수위가 왜 하필 출교여야 했는가가 논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행진은 출교를 요구한 사람들이 마치 “처벌주의에 경도”된 것처럼 묘사하지만, 우리가 출교를 요구한 이유는 최고 수위의 징계를 무조건 선호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출교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은 이번 사건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가해자가 끔찍한 성추행을 저질러놓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삼는 설문조사를 하고 호화 변호인단을 동원해 자신을 변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학교로 복귀하고 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것 자체를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한 유일한 길은 가해자를 출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피해자 자신이 요구한 것이기도 했다.
만약 징계 수준이 퇴학에 그쳤다면 빠르면 한 학기만에 복학할 수도 있었고, 의대의 특성상 그 이후라도 언제든 병원에서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이것은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행진은 “피해자는 수치스러운 기억과 배신감과 상처를 안은 채 공동체를 떠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출교 요구 운동이 바로 이를 위한 운동이었다!
행진은 2006년 고려대 당국에 의해 출교돼 오랫동안 투쟁해 왔던 다함께 회원들이 이번에는 출교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순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출교 요구는 학교의 징계권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태를 추상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혀 모순될 이유가 없다. 출교의 구체적인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2006년 출교는 학생운동 탄압을 위한 조처였지만, 이번 출교 요구는 성추행 가해자들을 비호하려는 학교 당국에 맞서 터져 나온 요구였다. 이렇게 등 떠밀려 내린 징계 때문에 학교의 징계권이 강화된다는 논리도 납득하기 어렵다.
행진은 “처벌의 주체가 학교인 한, 출교를 포함한 어떤 징계든 … 가부장적인 의미가 매우 강력할 따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 반성폭력 운동이 그래왔듯이, 설사 가해자를 처벌하는 주체가 국가나 기업주나 학교당국일지라도 피해자를 보호하고 여성차별적 편견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처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번 사건에서 학교당국은 가해자를 비호하려 했고, 운동의 압력 때문에 마지 못해 출교를 내린 것이므로 이번 출교 조처가 가부장적 동기에서 비롯했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맞지 않다.
사실, 처벌의 주체 문제에서도 행진은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학교가 ‘가부장적’ 주체이기 때문에 기대할 게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에게 ‘[성폭력 가해자를 교화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행진은 계속해서 ‘공동체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바로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출교)를 받도록 요구하는 것이 ‘공동체의 책임’을 다하는 길이었다. 만약 이 요구를 망설이다가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가해자가 의기양양하게 학교로 복귀할 길을 열어줬을 것이고, 피해자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며 학교를 그만둬야 했을 것이다.
학교의 명예?
행진이 출교 요구 운동을 폄하하는 또다른 근거는 많은 학생들이 출교 서명에 동참한 동기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교 요구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앞세운 적이 없다. 여성차별과 성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에 도전하기 위해서 운동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설사 일부 학생들이 ‘학교의 명예’를 위해 출교 요구에 동의했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에서 ‘명예’ 논리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조직의 명예’를 내세워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침묵을 강요하는 경우다. 가령, 2004년 밀양에서 집단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경찰은 피해 여성에게 되레 “밀양 물을 흐렸다”며 비난했고, 2008년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 사건에서도 해당 노조가 조직의 명예를 내세우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건 해결을 지연시켰다. 이런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번에 사람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명예’를 떠올렸다. 동료 여학생에게 끔찍한 성추행을 저지른 가해 학생과, 그들을 비호하는 학교당국이 공동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여긴 것이다. 따라서 ‘명예’라는 말만 보고 출교 요구 운동을 꼬투리잡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태도다.
행진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 고유의 페미니즘 관점에 입각하지 않은 운동은 진정한 반성폭력 운동이 아니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결국 행진은 출교 요구 운동에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참가하지 않다가, 그 운동의 성과로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가 학교로 복귀할 수 있게 되자 “그렇게 속이 시원하지는 않다는 느낌”, ”허무함” 이라는 말을 하며 운동의 성과를 깎아내리고 있다. 그리고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서야 뒤늦게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행진의 주장처럼 이번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해서 모든 성폭력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다함께는 앞으로도 이번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과 함께 여성차별에 맞서 토론ㆍ논쟁하고 투쟁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여성차별의 토대가 되는 체제 변화를 위해 싸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제가 이번 출교 요구 운동과 대립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행진이 이번 사건에서 취한 태도에서 벗어나 향후 여성운동에서 함께 행동할 기회가 늘어나길 바란다.
(2011년 10월 26일)
ⓒ<레프트21>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