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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의 기원

21세기 맑스주의 | 2009/04/21 21:41 | Posted by 대학생다함께

이 글은 "119주년 세계노동자의 날 범국민대회 자료집 - 경제위기 시대, 대학생들이 저항에 나서야 하는 이유"에 실렸습니다. 이 글 아래의 박스로 가시면 자료집에 실린 다른 글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시가 행진이 시작됐다. 수천 명씩 무리를 지어 출발하고 있었다. 숨가쁘게 고동치는 가슴을 안고 벅찬 연대감을 느끼며 아이들은 가끔씩 부모의 손을 떨치고 앞으로 뛰어나가기도 했다. 사람들은 의기양양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뒤를 잇고 있는 웅대한 행렬을 자꾸만 뒤돌아 보았다. 그것은 단결한 노동자들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것은 몇 년 후에 메이 데이라는 발상에 영감을 불어넣은 1886년 5월 미국 노동자 시가 행진을 묘사한 글이다.

1886년 5월 1일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첫 시위를 주최했다. 미국에서 1886년은 노동자 투쟁이 거대하게 분출했던 격동의 해였다. 수많은 파업들이 사실상의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절정에 달하면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파업 물결

1886년의 파업 참가자 수는 몇 해 전의 세 배로 증가했다. 파업으로 손해를 본 기업 수도 거의 네 배가 됐다.

파업의 성격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880년대 초반 경기 침체기의 파업은 주로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파업은 노동시간, 고용과 해고, 노동 편제, 십장과 감독관의 전횡적인 권한과 같은 쟁점을 두고 힘을 겨루는 것으로 바뀌었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을 나눔으로써 작업량을 줄이고 실업을 줄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노동자 계급에 인기 있는 요구였다. 1830년대 이래로 노동 단체들은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8시간 노동은 법률로 제정된 뒤에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1884년에 염색 노동자 단체인 '업종과 노동 조합 연맹'은 "1886년 5월 1일부로 8시간 노동이 법정 노동일이 돼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제스처에 지나지 않은 일이 1886년의 변화된 조건 때문에 혁명적 위협이 됐다."

우리가 너희를 천년 내내 먹여살려왔다!

우리가 너희를 천년 내내 먹여살려왔다!

메이 데이 파업 운동은 처음에는 여러 노동자 계급 단체의 지도자들, 특히 노동기사단 지도부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파업이 갑작스럽고 폭발적으로 분출하자 노동기사단도 매우 급속하게, 또 거대하게 성장했다.

노동기사단은 1884년 7월에 7만 1천3백26명이었는데, 1885년에는 11만 1천3백96명이었고, 1886년 7월에는 72만 9천6백77명으로 늘어났다. 사용자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요구들을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치 단체들에 호감을 가지게 됐다.

노동기사단으로 구현된 위대한 정서에는 모든 노동자들, 즉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숙련 노동자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노동자들의 단결이라는 사상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노동기사단의 지도자였던 테렌스 파우덜리는 파업 요구에 반대했다. 그러나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행동에 돌입하자 파업 요구가 지지를 받았다. 미국 전역의 지역 조직들이 5월 1일을 위해 조직하고 동원하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들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일어났다. 다른 노동 쟁의들에서도 8시간 노동이 요구 사항으로 추가됐다.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졌다. 이 운동은 시카고ㆍ뉴욕ㆍ신시내티ㆍ볼티모어ㆍ밀워키 등 주요 공업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5월 1일 전에도 전국에서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위한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미 노동시간 단축을 보장받았다. 운동은 예상보다 더 크게 확대됐다. 5월 둘째 주에는 34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으며, 그 중 19만 명이 파업을 했다.

헤이마켓 사건

메이 데이 운동이 성공을 거둔 것은 단지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운동은 현장의 투사와 사회주의자들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밀워키에서 메이 데이 파업을 위한 준비가 훌륭한 본보기였다. 1886년 2월 노동기사단의 지역 조직들이 8시간 노동 동맹을 결성했다. 한 달 뒤에는 노조가 이 동맹에 가세했다.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이 동맹의 결성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헤이마켓의 지도자들

헤이마켓의 지도자들

5월 1일이 다가오자 2백 개 공장의 노동자들이 공동 요구를 작성했다. 5월 1일 3천 명의 맥주 공장 노동자와 1천5백 명의 목수 노동자 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밖에도 건설 노동자, 제빵 노동자, 담배 제조 노동자, 벽돌 공장 노동자, 도살장 노동자 들도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5월 내내 계속됐다. 5월 말에는 1만 4천 명이 파업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조업중인 공장으로 행진해 거기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해 흔히 성공을 거두곤 했다.

파업의 의미를 잘 알고 있던 한 압연공장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을 부리는 나의 권리와 나에게 시간과 노동을 파는 당신의 권리"가 쟁점이 되고 있는데, "우리의 모든 문명과 자립은 여기에 달려 있다."

기업주들에 대한 위협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주(州) 정부는 파업 노동자들을 살해하고 노동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민병대의 유혈낭자한 무력을 사용했다. 무력 사용은 8시간 노동 운동의 중심이었던 시카고에서 절정에 달했다.

시카고에서는 8시간 노동 운동이 메이 데이 전에 이미 양보를 얻어 냈다. 당시의 한 급진적 신문(<존 스윈턴 신문>)이 보도하고 있듯이, "8시간 노동이 붐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거듭 승리를 거두고 있다. …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룬 커다란 승리에 즐거워하고 있다."

1886년 5월 3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경찰은 파업 노동자 4명을 죽였다

1886년 5월 3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경찰은 파업 노동자 4명을 죽였다

8시간 노동 운동은 성공과 함께 유혈낭자한 결말을 맞았다. 5월 3일 경찰은 파업 노동자 4명을 죽였다.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파업 노동자들의 야간 집회에서 시위 군중을 공격하는 경찰을 향해 폭탄이 던져졌다. 이 사건은 조작으로 의심됐다. 지배자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해 시위를 금지하고 수백 명의 시위자들을 잡아갔다. 강경 대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8시간 노동 동맹의 지도자 7명이 체포됐다. 전 세계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자 단체 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4명이 사형당했다.

사형에 처해진 네 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스파이스는 감명 깊은 최후진술을 통해 국가의 물리적 공격도 노동자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 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고 불꽃은 타오르고 있다. …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는 없으리라.

들불

메이 데이 경축은 처음부터 민족적ㆍ인종적 구분을 뛰어넘었다.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는 흑인과 백인 노동기사단원들이 8시간 노동을 지지하는 조직을 함께 건설했다. 흑인들의 주간지였던 <클리블랜드 가제트> 는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는 노동기사단원의 절반이 흑인이며, "흑인과 백인 노동자 간에는 유대가 넘쳐흘렀다"고 보도했다.

텍사스 주 포트 워쓰에서는 백인과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함께 행진했다. 그리고 함께 소풍을 가서 음식을 먹고 노동기사단 지부의 흑인 지도자와 최초의 멕시코계 미국인 노조 지부의 마누엘 로페스와 몇몇 백인들의 연설을 들었다. 당시의 한 신문은 "이것은 텍사스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다." 하고 보도할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1886년 미국에서 벌어진 일은 유럽의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촉발시켜 행동에 나서도록 했다. 1889년 유럽 전역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참가한 회합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됐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890년 5월 1일부터 헤이마켓 광장 집회를 기념하는 국제적인 시위를 주최하기로 하고 8시간 노동을 위한 대규모 운동을 시작했다.

1890년 5월 1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는 5만 명의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80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했다. 벨기에에서는 34만 명이 메이 데이 행사에 참가했다.

영국에서는 런던의 중심지에 있는 하이드 파크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 참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90년 5월 11일에 글을 쓰면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전투력을 점검하면서 당면 목표인 8시간 표준 노동일을 위해 하나의 깃발 아래 하나의 군대로 움직이고 있다.

1년 뒤에는 유럽 전역에서 메이 데이 파업과 항의 시위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의 약 10퍼센트가, 프랑스에서는 거의 1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메이 데이 행사에 참가했다. 미국뿐 아니라 벨기에ㆍ이탈리아ㆍ스페인ㆍ스위스ㆍ스칸디나비아반도ㆍ루마니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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